영화 캐스트어웨이 ㅣ FedEx

투싼과 아즈텍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 2008-13)와 ‘워킹 데드'(Walking Dead, 2010-현재)는 미국의 케이블 영화채널 AMC에서 큰 히트를 친 시리즈물이다. 이 둘은 같은 채널에서 방영했다는 것 외에도 공통점이 좀 있다. 평범한 직업(고등학교 교사, 경찰)을 가진 중년 남성이 극한상황(암투병과 마약제조, 좀비 아포칼립스)에 처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서서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고, 두 경우 모두 아내들은 시청자들이 미워할 만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리고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두 남성 주인공은 모두 선한 인물에서 악한 인물, 혹은 선과 악을 구분하기 힘든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로 발전한다. 전혀 다른 플롯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두 작품이 모두 20대 남성들을 주요 오디언스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소 여성혐오적인 요소를 살짝 깔고 있는 것과 함께 세상에 맞서며 때로는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선이 굵은 남성으로 변모하는 과정도 모두 20대 미국 남성들에게 어필하는 캐릭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들어갔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맞서는 남자 주인공에게는 반드시 믿을 만한 이동수단이 필요하다. 서부영화의 카우보이에게는 말이 필요하고, 배트맨에게는 배트모빌이 필요하듯 현대의 영웅들에게는 자동차, 특히 험지를 달릴 수 있는 SUV가 제격이다. 하지만 20대 남성들은 은행잔고가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화려한 대형차 보다는 소형 SUV를 좀 더 동일시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중년남성이 주인공이고, 특히 워킹데드의 경우 아무 차나 골라 타면 되는 상황인데도 굳이 소형 SUV를 타고 다니는 이유는 바로 오디언스가 10, 20대 남성들이기 때문이다.

‘워킹 데드'의 주인공 릭 그라임즈는 현대 투싼을,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는 폰티악 아즈텍을 탄다. 적어도 초기 시즌들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이 두 차종 중에서 스튜디오에 프로덕트 플레스먼트(Product Placement, 제품배치), 즉 PPL은 하나 뿐이다. 현대 투싼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타는 자동차가 PPL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그 모델이 최신 모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거다. 2008년에 시작한 ‘워킹 데드’에 등장한 2세대 투싼은 이제 막 미국시장에 출시되려던 모델이었던 반면, 2010년에 선보인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이 중고차로 구매한 아즈텍은 이미 2005년에 단종된 모델이었을 뿐 아니라, 폰티악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2010년에 문을 닫았다. 즉, 광고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차였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가 이 차를 산 것은 제작비 동원 수단이 아니라, 영화의 플롯에 필요한 하나의 장치였다. 치밀한 성격의 화이트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마약제조범이 탈 것 같지 않은, 눈에 띄지 않는 차’를 필요로 했고, "가장 못생긴 차” 아즈텍이 그런 차였다.

사실 아즈텍은 이미 저물어가던 폰티악이 내어놓은 최대의 실패작 중 하나였다. 지금 보면 꽤 앞서 보이는 실험적인 디자인이지만, 이 모델이 나왔던 2000년대 초에는 비웃음거리였다. 따라서 극중 주인공이 이 차를 탄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등장했다.

소품과 브랜드 브로셔

‘워킹 데드'에 등장한 현대 투싼도 제법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현대는 시리즈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면서 가성비 높은 PPL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워킹 데드'를 본 사람들 중에서 투싼이 PPL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PPL로 등장하는 자동차들이 대개 그렇듯 극중의 투싼은 절대 고장나거나, 사고로 망가지지 않고, 비포장도로를 달려도 차체는 크게 더러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는 계약서에 투싼으로 좀비를 죽이면 안된다는 조항도 붙였다고 한다). 반면 PPL이 아닌 아즈텍은 주인공이 마음대로 험하게 다루고 망가진다.

모든 자동차 기업들이 PPL 차량을 곱게 다루게 강요하지 않는다. '쥬라기 공원2: 잃어버린 세계'(1997)에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신형 SUV ML 클래스가 등장해서 강인한 모습을 선보였지만 결국 온전하게 끝나지 못한다. 하지만 덕분에 관객들은 이 모델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기업이 '쥬라기 월드'(2015)에 이르면 자동차가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영화를 광고 브로셔 취급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벤츠 뿐 아니라, 트라이엄프 모터싸이클, 컨버스 운동화, 코카콜라 등의 브랜드 제품을 PPL로 대거 등장시켜 하나의 거대한 광고물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슷한 예가 tvN의 '비밀의 숲'(2017)과 '나의 아저씨'(2018)에 각각 등장하는 현대 자동차와 쉐보레 자동차 PPL이다. 이 드라마들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타는 차를 일제히 하나의 브랜드로 통일하는 바람에 드라마의 현실성을 떨어뜨린다. 특히 '나의 아저씨’의 경우 주요인물들의 차량은 물론, 주차장에 세워둔 다른 차량들도 모조리 쉐보레 모델로만 채워 넣었고, 다른 브랜드의 차량이 (가령 택시로) 등장하면 검은 스티커로 로고를 가리는 등의 노골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물론 자동차가 많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드라마에서 다른 브랜드를 노출시키는 것은 광고주가 반길 일은 아니겠지만, 다른 차량들의 노출을 줄이고 한 브랜드의 한 모델에 집중하는 대신 드라마를 한 브랜드의 라인업이 모두 등장하는 브로셔로 만드는 것이 더 나은 광고효과를 내는지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광고도 결국 오디언스를 대상으로 한다

온갖 제품과 브랜드가 넘쳐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진에게 PPL은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존재다. 내용 전개상 주인공이 차를 타는 장면이 나와야 하는데, 그 자동차를 스튜디오가 소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 결국 시중에 팔리는 자동차를 사용해야 하는데, 인기가 있을 콘텐츠라면 자사의 제품을 타는 설정을 만들었으면 하는 자동차 회사들이 많을 수 밖에 없다.

특정 메이커, 특정 모델의 승용차가 소품으로 선택되는 과정에서 공식적인 PPL 계약이 없다면 이 과정은 암암리에 일어날 것이고, 세금에 잡히지 않는 뒷돈이 오가는 불법행위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 절차가 잘 작동한다면 스튜디오는 제작비를 마련하는 좋은 수단을 얻게 된다. 따라서 PPL은 불가피한 제품 노출이 일어나야 할 경우 선택과정을 투명하게 해서 불법행위를 막고, 제작비를 지원받는 상호 윈윈(Win-Win) 전략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있다. 바로 오디언스다. 영상을 보기 위해 영화관 입장료 혹은 스트리밍 이용료를 지불했거나, 아니면 TV 드라마 앞뒤의 광고를 시청함으로써 (일종의) 비용을 지불했는데, 본 영상에서 또 광고를 봐야 하는 ‘숨은 비용’이 발생하는 상황이라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오디언스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고 PPL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싫어하는 건 ‘고민없이 쑤셔 넣는’ 제품 PPL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한국도 이제는 지진에서 안전한 나라가 아니니 지진에 강한 철을 사용해야 한다”며 현대제철의 브로셔를 보여주는 장면은 오디언스를 광고시청자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시리즈 내내 감정을 이입시켜온 주인공에게 문맥에도 없는 말을 하게 만든 광고주에게 분노하게 되는 역효과를 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광고는 궁극적으로 오디언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광고주들이 이런 근본적인 목적의식을 상실한 채 엉뚱한 성과지표(KPI, Key Perfomance Indicator)를 만들어내어 제작진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무리한 PPL과 비웃음을 자아내는 PPL이 탄생한다. PPL을 통해 만나는 광고의 오디언스는 그 PPL이 들어간 드라마, 영화의 오디언스와 동일한 집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현재 즐기고 있는 것을 방해하면 광고주에 대한 원망이 생긴다. 대기업이라는 조직내에서 상부 보고에 용이한 성과지표를 만들어 내다보면 결국 오디언스의 생각을 바꾸려 했던 본질적이고 최종적인 목표에서 오히려 멀어지게 된다.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전설적인 PPL들이 가진 것

헐리우드에는 전설적인 PPL의 사례들이 존재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에서 주인공 아이는 Reese’s Pieces라는 초콜릿을 사용해서 외계인을 끌어들인다. 제조사인 허쉬는 PPL을 위해 유니버설 스튜디오와의 홍보계약에 1백 만 달러를 사용했지만 20배에 가까운 홍보효과를 얻었다.

톰 크루즈를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 ‘리스키 비즈니스’(Risky Business, 1983)는 쇠락해가고 있던 레이밴(Ray-Ban) 선글라스를 부활시켰고, 그 후로 톰 크루즈는 ’탑건’(1986)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레이밴 선글라스를 쓰고 나와 브랜드를 꾸준하게 띄워줬다. 이 두 영화의 경우 다른 초콜릿, 다른 선글라스를 썼어도 영화는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다면 다른 제품들이 광고효과를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안 잡’(Italian Job)의 경우 1969년 원작과 2003년 리메이크 모두 미니 쿠퍼 승용차가 아니면 안될 만큼 제품에 특화된 작품이었다.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2000) 역시 주인공이 국제 화물운송업체 페덱스의 직원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어서 기획단계부터 철저하게 PPL을 염두에 둔 작품이었다. 또한 ‘좀비랜드'(Zombieland, 2009)에서는 싸구려 미국 간식의 대명사 트윙키(Twinkies)를 먹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트윙키에 대한 사랑이 이 인물의 성격과 찰떡같이 맞는 바람에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들은 모두 노골적인 PPL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등장한 제품들이 각 영화에서 분명한 ‘역할’을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오디언스는 내용과 무관하게 들어간 제품을 싫어할 뿐,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들어간 PPL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한 술 더 떠서 아예 PPL임을 내놓고 밝혀서 그 자체로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경우들도 있다. 코미디언 마이크 마이어스를 세계적인 코미디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 '웨인즈월드’(Wayne’s World, 1992)에서는 주인공이 PPL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능청스럽게 제품을 하나씩 들고 카메라를 보며 광고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JTBC의 드라마 ‘멜로가 체질’(2019)에서도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PPL을 논의하는 과정에 PPL를 집어넣는 기발한 방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팬들의 사랑을 받은 PPL들이다.

타협의 예술

영화와 드라마처럼 큰 자본이 들어가는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자들 중에서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큰 제작비가 들어갈 때는 투자비의 회수라는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작품성보다 흥행가능성이 더 중요하게 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본부터 배우 캐스팅까지 모든 결정에 개입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소위 '오투어(auteur)' 감독이 아닌 한 100%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감독들은 ‘비극은 잘 안 팔리니 해피엔딩으로 바꾸자’ 혹은, ‘관객들이 좋아하니 원작에 없는 강도 높은 노출신도 넣자’와 같은 다양한 요구와 작품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건축, 정치와 마찬가지로 타협의 예술(art of compromise)이다. 뛰어난 흥행 감독들은 이런 타협, 협상을 통해 자신의 작품성을 지키는 동시에 상업성까지 얻어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PPL도 그렇게 제작진과 광고주 사이에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많고 까다로운 요소들 중 하나일 뿐, 다른 제작 요소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난관이 아니다. 인기는 있는데 연기를 못하는 배우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압력을 피할 수 없을 때 쉽게 굴복해서 작품을 망치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대사를 잘 못하는 배우 이정재를 쓰는 대신 조용하고 말없는 인물로 만들어서 작품을 지켜낸 김종학 감독 같은 사람도 있다.

궁극적으로 오디언스가 싫어하지 않는 PPL은 제작진이 고민한 흔적,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PPL이다. 광고주가 원하는대로 다 받아서 넣지 않고, 설득과 협상, 그리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작품을 살려내고 광고주도 만족시키는 것도 제작진의 실력이다. 결국 오디언스는 그런 실력을 보고 싶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