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연예인을 따라다니는 극성팬을 흔히 "스탠(stan)”이라 부른다. 스토커(stalker)와 팬(fan)을 결합한 신조어로, 최근에는 케이팝(K-pop) 팬들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된다. 아미(Army)라는 표현이 BTS 팬들에 국한되어 있다면 스탠은 좀 더 넓은 열성팬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케이팝 스탠들이 최근 미국 내 정치뉴스에 등장하는 일이 잦아졌다.

#WhiteLivesMatter

한국에도 잘 알려진 것처럼 지난 6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오클라호마주 선거유세가 흥행에 실패한 배경에는 BTS 팬들이 대규모로 '사전예약, 행사직전 취소’ 작전을 펼친 것이 큰 몫을 했다. 평소 BTS와 관련해서 온라인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라 행사담당자들과 언론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벌인 일이었다.

얼마 후 트럼프는 선거운동 총책임자인 브래드 파스케일을 해고했는데 오클라호마에서 흥행실패로 망신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전해졌다. 파스케일은 2016년에 트럼프를 당선시킨 일등공신 소셜미디어 전략가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유명 소셜미디어 전략가가 잘 조직된 케이팝 팬들의 전술에 말려든 것이기 때문이다.

[ 캠페인에서 상대의 메시지를 빼앗는 법]

사회정의(social justice)는 케이팝 뮤지션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아니지만 10대와 20대로 이뤄진 팬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팬덤(fandom)이 하나의 중요한 커뮤니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단체행동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사용하는 해시태그를 빼앗은(talke over) 것이다.

큐아넌(QAnon)을 비롯한 인종주의자들은 지난 봄, 여름을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된 Black Lives Matter(흑인들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에 반대하면서 White Lives Matter라는 메시지를 온라인에서 퍼뜨리고 있었다. 케이팝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들의 사진을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에서 공유하면서 #WhiteLivesMatter라는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한 거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케이팝 팬들이 인종주의자들이었어?”하고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이건 '메시지 점유’에 해당한다. 증오발언이나 자신이 반대하는 단체, 혹은 경쟁하는 조직의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own), 빼앗아서 메시지를 무력화(neutralize)해버리는 행동이다.

레드 와인 앤드 블루

메시지 빼앗기의 대표적인 예가 오하이오주 교외지역 여성들의 바이든 선거운동이다. 오하이오주는 2016년에 트럼프를 지지했고, 2018년 중간선거 때 민주당 의원들을 대거 당선시킨 다른 주와 달리 공화당을 꾸준히 지지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을 바꾸려는 노력이 중산층이 많이 사는 교외지역(suburbs) 대졸 여성, 주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 단체 중 하나가 ‘레드 와인 앤드 블루’다. 미국을 상징하는 색조합인 “Red, White and Blue”를 살짝 바꾼 “Red Wine and Blue”는 교외지역 주부들이 모여서 와인을 마시면서 오하이오주를 민주당 지지(blue)로 바꾸는 운동을 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실 교외지역의 여성들은 트럼프가 암묵적으로 ‘바이든을 지지하면 가난한 흑인들이 당신들이 사는 교외지역으로 몰려온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자신에게 끌어들이려는 중요한 유권자 집단이다. 트럼프는 특히 뉴저지의 흑인 상원의원인 코리 부커를 콕 집어서 “바이든이 당선되면 코리 부커가 앞장서서 교외지역을 망칠 것”이라고 공격했다.

레드 와인 앤드 블루는 트럼프의 이런 인종주의적인 발언에 반대하기 위해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대신 트럼프의 주장을 고스란히 가져와서 환영한다는 영상을 만들었다. 잘생긴 코리 부커 의원이 자기네 동네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여성들이 너무나 신나서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맛없는 피자, 만년 2위 렌터카 기업

자신에게 적대적인 메시지가 경쟁상대가 아닌 소비자들에게서 나와도 마찬가지다. 불리한 메시지에 설득력 있는 반박을 할 수 없고, 무엇보다 그 메시지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을 때 버티는 것 보다는 솔직히 인정하는 게 오히려 큰 PR효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유명한 사례가 도미노피자(Domino’s)의 광고다. 미국시장에서 피자헛과 함께 배달 피자의 대명사인 도미노피자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도미노피자는 종이상자(cardboard box)를 씹어 먹는 것 같다”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던 시점에 도미노 매장의 주방에서 일하던 직원이 피자에 코딱지를 집어넣는 장면이 소셜에 퍼지면서 대대적인 보이콧이 일어났고, 도미노피자는 그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 때 경영진이 선택한 방법은 정공법이었다. “맞습니다. 우리 피자는 맛이 없습니다”라고 인정을 하고, 자신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꿔서 다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으려는지 낱낱이 공개하는 것이었다.

도미노피자는 포커스그룹이 "도미노 피자는 종이상자를 먹는 것 같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장면을 사내 피자개발팀이 보면서 충격을 받는 장면을 광고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광고에 CEO가 나와서 "맛 없는 거 인정합니다. 바꾸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했다. 소비자들 중에는 처음에는 그저 대기업의 뻔한 홍보전략일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기네 음식이 맛이 없다고 인정하는 광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도미노피자는 실제로 개선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격은 다르지만 소위 '언더독(underdog) 마케팅'의 교과서 같은 예에 해당하는 에이비스(Avis) 렌터카의 전략도 비슷하게 솔직한 인정으로 시작한다. 지금은 업계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 렌터카 업계에서 만년 2위였던 에이비스는 1위 허츠(Hertz)를 뛰어넘기 힘들다는 사실, 그리고 허츠가 항상 “업계 1위”를 홍보에서 강조한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신의 홍보에 이용하는 전략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에이비스는 렌터카 업계에서 2위에 불과한데 왜 저희를 이용해야 할까요?”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하면서 시작하는 에이비스의 광고는 “2위이기 때문에 1위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고, 그래서 1위보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원래는 허츠가 1위라는 광고를 해대는 바람에 그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이 광고는 큰 화제가 되었고 너무나 유명해져서 결국 허츠가 이에 대응하는 광고를 제작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에이비스는 지난 몇 년 동안 '허츠가 업계 1위'라고 이야기해왔죠. 왜 그런지 저희가 알려드리겠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광고는 에이비스의 ‘2위 인정' 광고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Drown Out

이런 방법들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이뤄지는 혐오/증오발언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된다. 이게 오프라인에서 시민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라면, 상대의 메시지 빼앗기, 해시태그 탈취운동은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드라운아웃 전략이다.

지난 달 대선후보 토론회 때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명한 백인우월주의 단체가 화제가 되었다. ‘프라우드 보이즈(Proud Boys)’라는 이 단체는 트럼프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BLM 시위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토론회 때 사회자가 트럼프에게 이들의 집단행동을 중단하라고 선언하라고 촉구하자, 트럼프는 “프라우드 보이즈, 잠시 대기하고 있어(Stand back, stand by)”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케이팝 팬들이 벌이는 해시태그 운동은 상대의 메시지를 가져다가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위의 사례들과 비슷하지만 인터넷에서의 조직역량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상대조직의 해시태그를 가져와서 검색 상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 수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일사불란한 행동이 필수적이다. 백인우월주의자 단체들 역시 많은 경우 인터넷에서 출발했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지만 온라인 집단행동의 속도에서는 케이팝 팬들을 따를 수가 없다.

그 결과 케이팝 팬들의 집단행동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인종주의 해시태그를 '드라운아웃(drown out)’ 시킬 수 있었다. 한 쪽의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드라운아웃은 실제로 물리적으로 사용되는 유명한 방법이다. 요즘은 잠잠해졌지만 동성애혐오단체인 웨스트보로 교회(Westboro Church) 사람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시위를 벌일 때 사람들이 몰려나와 그들보다 더 큰 소리를 내어 혐오단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거나, 총기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시위가 벌어지면 바이커 단체가 찾아와 요란한 엔진음으로 압도해버리는 게 대표적인 예다.

이런 방법들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이뤄지는 혐오/증오발언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된다. 이게 오프라인에서 시민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라면, 상대의 메시지 빼앗기, 해시태그 탈취운동은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드라운아웃 전략이다.

지난 달 대선후보 토론회 때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명한 백인우월주의 단체가 화제가 되었다. ‘프라우드 보이즈(Proud Boys)’라는 이 단체는 트럼프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BLM 시위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토론회 때 사회자가 트럼프에게 이들의 집단행동을 중단하라고 선언하라고 촉구하자, 트럼프는 “프라우드 보이즈, 잠시 대기하고 있어(Stand back, stand by)”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 중에는 LGBTQ 커뮤니티가 있었다. 프라우드 보이즈 이전에 이미 pride/proud라는 구호를 사용하던 이들은 일제히 #proudboys라는 해시태그를 인스타그램,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집중적으로 사용해 혐오단체의 해시태그에 맞섰고, 다른 시민들이 공유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군복 차림에 소총을 들고 “(헤테로)남성스러움”을 강조하는 이들이 자랑하던 로고가 하루아침에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게이의 상징으로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