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

십대의 임신을 다룬 영화 '주노(Juno)'로 유명해진 배우 엘렌 페이지(Ellen Page)가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밝히고 앞으로는 엘리엇 페이지(Elliot Page)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선언했다.(대명사는 he/they를 사용) 우리나라에는 영화 ‘인셉션(Inception)'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페이지는 2014년에 자신이 게이임을 밝히고, 사귀던 여성과 결혼을 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트랜스젠더임을 밝힌 것.

이 소식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축하의 메시지를 남겼고, 성역할에 지극히 보수적인 헐리우드 문화가 유명배우의 커밍아웃으로 좀 더 다양성을 가지게 되기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33세의 나이에 트랜스젠더를 선언하기까지 페이지가 겪은 일은 소셜미디어에 가득한 축하한다는 메시지 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켈리 맥길리스(Kelly McGillis)

배우들의 커밍아웃

198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 ‘탑건'(1986)'의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켈리 맥길리스가 동성애자임을 밝힌 것은 52세가 되던 2009년의 일이다. 영화 ‘양들의 침묵’(1991)의 여주인공 역을 했던 조디 포스터가 커밍아웃을 한 것은 2007년, 45세 때였다. 인기 TV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의 배우 신시아 닉슨은 2004년, 자신이 38세 때 레즈비언임을 밝혔다. 엘리엇 페이지가 처음 커밍아웃한 것은 27세 때였다. 이 네 명의 배우가 할리우드의 LGBTQ를 대표하지는 않겠지만,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이들의 커밍아웃 시점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영상: 엘리엇 (당시 엘렌) 페이지의 2014년 커밍아웃 선언

물론 이들이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시점에 찾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비로소 밝힐 수 있는" 시점이 빨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부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일어난 일이다. 성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일반사회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천천히 변하는 할리우드의 문화를 생각하면 배우들은 일반인들 보다 훨씬 더 심각한 차별을 체험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열 살의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페이지는 십대 시절에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성추행과 성희롱을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하기 전부터 영화판에서는 그의 성 정체성을 두고 말이 많았다. 특히 영화 '엑스맨’(2006)을 촬영하던 중 브랫 래트너 감독은 촬영장에서 엘리엇(당시 엘렌) 페이지 옆에 서 있던 한 여성에게 “You should f*ck her to make her realize she’s gay”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페이지는  커밍아웃 전 자신이 게이임을 눈치챈 영화계 사람들이 “절대로 커밍아웃해서는 안 된다”라는 충고를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배우가 게이임이 밝혀지면 맡게 되는 역할에 제한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왜 그럴까? 레즈비언인 것으로 알려진 여성이 이성애자의 역할을 맡게 되면 관객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편견 때문이다.

‘대중의 환상’이라는 핑계

그런데 위의 주장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다. 배우가 극중 인물을 연기하는 것을 모르는 관객은 없다. 탑건의 주인공 역할을 한 톰 크루즈가 실제로 전투기를 조종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영화 ‘트와일라잇’에서 로버트 패틴슨이 뱀파이어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가 현실에서도 피를 빨아먹는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없다. 그런데 LGBTQ 배우가 이성애자 역할을 연기한다고 관객들이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느낄까?

미국의 인기 시트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When I Met Your Mother)’에서 배우 닉 패트릭 해리스는 이성애자 역할을 했지만, 그는 이미 게이로 커밍아웃을 한 후였다. 하지만 관객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그의 연기를 즐기고 좋아했다. 거꾸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LGBTQ 역을 맡는 배우들은 압도적으로 이성애자로 알려진 배우들이다. 히스 레저와 제이크 질렌할은 둘 다 이성애자였음에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게이 카우보이 연기를 했고, 관객들은 배우의 성 정체성과 상관없이 뛰어난 연기에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할리우드는 타고난 성이 여성이고, 여성 배우로 연기를 시작한 배우들에 대해서 만큼은 유독 차별이 심하다. 이들은 연기만 잘해서는 안되고, 남자 관객들이 환상을 가질 수 있도록 시스젠더 여성이어야 한다는 (근거가 부족한) 요구가 있는 거다. 한국과 일본에서 아이돌 가수들이 이성 교제를 하면 안 된다는 계약조건을 내걸었던 것도 비슷한 ‘대중의 환상’에 부응해야 한다는 요구다.

새로운 영역, 트랜스젠더

엘리엇 페이지는 2014년에 커밍아웃한 이후로 ‘Freeheld' (2015), 'My Days of Mercy' (2017) 같은 영화에서 레즈비언 여성의 역할을 연기했다. 페이지가 맡는 역할을 두고 한 기자는 “앞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게이 역할만을 맡게 될까 두렵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페이지는 그 질문에 “이성애자 여성 배우에게 ‘이성애자 역할만 맡는 게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느냐”면서, “내가 (동성애자 역할을 맡는 걸) 왜 걱정하겠느냐”라고 쏘아붙이면서 자신은 앞으로 동성애자 역할만 맡아도 좋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런 페이지가 이제 트랜스젠더로 다시 커밍아웃하면서 할리우드는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페이지만큼 인기있는 젊은 배우가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한 일은 아직 없다. 이번에 커밍아웃을 하면서 페이지는 자신을 부르는 대명사로 he(혹은 they)를 사용해달라고 했고,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각종 웹사이트와 언론매체에서는 일제히 페이지를 “he”로 칭하기 시작했다. 그런 페이지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배우 본인으로서는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힐러리 스웽크는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Boys Don’t Cry, 1999)’에서 트랜스젠더 남성의 역할을 해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이 사실이 주는 아이러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LGBTQ, 특히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는 크게 반발했었다.

Boys Don’t Cry의 한 장면 - 힐러리 스웽크(Hilary Swank)

할리우드에서 LGBTQ 역할을 시스젠더(cisgender, 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 트랜스젠더와 반대되는 개념) 배우들이 맡아온 사실이 스웽크의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최근까지도) 할리우드 영화에서 백인 배우가 아시안 역할을 맡거나, 과거 백인 배우가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 역할을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반발을 이해할 수 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뻐드렁니를 붙이고 우스꽝스런 일본인 역할을 한 백인배우 미키 루니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는 배우를 잃었다”라는 말도 나오지만, 이제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는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배우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엘리엇 페이지는 앞으로 트랜스젠더 역할만을 하게 될까, 아니면 모든 젠더를 넘나드는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될까? 지켜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특정 젠더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은 배우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사회로부터 생물학적 젠더에 “맞는” 사고와 행동방식을 부여받아 익히고, 평생 이를 연기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연기임을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엇 페이지 같은 배우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사회의 다양성의 테스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의 성공이 인류사회의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