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대학교 "과잠"이 있다면 미국의 대학들에는 후드티(hoodies), 스웨터(sweatshirts, 한국에서는 흔히 "맨투맨"이란 이름으로 통한다)가 있다. 흔히 큰 사이즈로 사서 편하게 입는 이런 후드티는 학교의 이름이나 로고, 마스코트가 그려져 있는데, 품질이 상당히 좋다. 투박한 옷이지만 아무리 빨아도 옷감이 상하지 않고 모양이나 색도 오래 유지된다. 그래서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이 대학생 시절에 입던 옷을 자랑스럽게 입는 것을 보는 것이 드물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대학교나 프로 스포츠팀의 이름이 적힌 옷들은 거의 예외없이 같은 브랜드의 제품이다. 바로 챔피언(Champion).

챔피언의 의류는 나이키나, 아디다스처럼 자신의 로고를 가슴에 새긴 옷보다 이렇게 다른 로고를 달고 팔리는 제품이 훨씬 더 많다. 이런 옷들은 속을 뒤집어 봐야 챔피언 제품인 걸 확인할 수 있다. 즉 챔피언의 의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팔린다. 눈에 잘 안띌 뿐이다. 적어도 몇 년 전까지는 그랬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촌스럽게 생각되던 챔피언의 로고가 커다랗게 찍힌 의류가 십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이 브랜드의 위상은 치솟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월마트에서 팔리던 옷

같은 브랜드라도 시장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 예를들어 맥도날드가 미국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미국인의 외식습관을 바꿔버릴 만큼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빈곤층 아이들의 나쁜 식습관을 만드는 주범으로 취급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자국에서 비판을 받는 브랜드라도 해외에 나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같은 맥도날드라도 모스크바나 베이징 같은 공산권 도시에 진출하면 개방의 상징으로 환영받고 고급 브랜드 대접을 받기도 했다.

내가 챔피언 의류를 처음 알게 된 2000년 전후에만 해도 이 브랜드는 앞서 이야기한 것 처럼 대학교에서 파는 후드티 처럼 다른 상표를 달고 팔리는 의류의 대명사였다. 그렇다고 질이 떨어지는 제품은 절대 아니었다. 입어보면 알지만 품질 하나 만큼은 다른 유명 스포츠 의류에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옷은 품질만으로 입지 않는다. 디자인과 브랜드가 이윤의 폭을 좌우하는데, 챔피언은 그런 브랜드가 아니었다.

물론 과거에도 챔피언도 자신의 로고를 달고 팔렸다. 하지만 따로 매장이 있던 것도 아니고, 팔리는 매장은 월마트와 같은 저가 매장이었다. 월마트에서 옷을 사는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계층이 많았으며, 순전히 기능으로서의 옷을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 아이들에게 월마트에서 파는 챔피언 의류는 가난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브랜드의 흥망성쇠

사실 챔피언은 스포츠 의류의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서깊은 브랜드다. 1919년에 니커보커 니팅 컴퍼니(Knickerbocker Knitting Company)라는 이름으로 시작했고, 1930년에 챔피언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그야말로 '백년기업'이다. (참고로, 아디다스는 1924년, 나이키는 1964년에 설립되었다).

그냥 오래되기만 한 기업도 아니다. 글의 서두에 후드티 이야기를 했지만, 서양에서 중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후드(hood)의 역사에서 우리가 지금 입는 현대적인 후드티를 만들어낸 기업이 바로 챔피언이다. 후드티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계기는 영화 '록키(Rocky, 1976)'에서 주인공 역을 했던 실베스터 스탤론이 입고 새벽의 필라델피아를 뛰면서 트레이닝을 하는 장면이었지만, 원래는 1930년대 뉴욕주 북부에서 추운 겨울에 작업하던 인부들이 입는 옷으로 챔피언에서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챔피언은 단지 후드티라는 새로운 스타일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지금은 모든 의류회사들이 사용하는 리버스위브(reverse weave)라는 직조법을 처음 개발해서 빨아도 줄어들지 않는 의류를 만들어내며 기술적인 우위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1980년대에 NCAA(전국대학체육협회)는 물론, 미식축구의 NFL, 프로농구의 NBA 같은 프로 스포츠 협회의 공머식 유니폼 공급업체가 되면서 브랜드의 가치와 함께 매출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미국 내 프로 스포츠 시장의 성장과 맞물려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던 챔피언 브랜드가 왜 추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있다. 우선 나이키와 같은 젊은 브랜드(블루리본스포츠라는 브랜드가 '나이키'라는 지금의 이름과 로고로 바꾼 것은 1971년의 일이다)들이 유명 선수들과 계약을 맺으며 스타 마케팅을 통해 시장을 빼앗았던 것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타 브랜드의 공격적 전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라리(Sara Lee)라는 식품제조회사에 인수되는 일이 벌어진다. 사라리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기업이지만 스포츠 의류사업과는 거리가 멀었고, 챔피언 브랜드 경영에 실패하면서 손을 놓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이키는 필 나이트라는 걸출한 경영인의 지휘 하에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제품은 좋았지만 브랜드가 중요해진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챔피언은 결국 자신의 브랜드는 옷 속의 라벨에만 표시하는 '공급업체'로 전락했다.

화려한 부활

그렇게 '가난한 아이들의 옷' 혹은 '단체복'의 취급을 받던 챔피언 브랜드의 로고가 갑자기 길거리와 온라인에서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2017, 18년을 전후해서 십대 아이들 사이에 챔피언 로고가 붙은 스웨터와 후드티가 큰 인기라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인스타걸, 브스코걸 처럼 온라인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사진을 올리는 아이들 사이에 커다란 챔피언 스웨터, 후드티가 마치 유니폼처럼 필수 아이템이 된 것이다.

한때는 가난의 상징처럼 보여서 옷 속 라벨로 숨겼던 챔피언의 로고는 이제 크면 클수록 좋은 십대문화의 상징처럼 변했고, 이런 인기와 함께 챔피언 의류는 더이상 월마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귀한 존재로 변해다. 이제는 잇걸(it girl)들이 찾는 브랜드가 되었으니 더 이상 월마트에서 유통할 수 없는 가격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품질이 더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챔피언의 품질은 사람들이 항상 인정했다. 브랜드의 가치가 변했을 뿐이다.

이렇게 느닷없어 보이는 부활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1980년대 레트로의 유행이다. 챔피언이 십대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2017년 무렵은 80년대 레트로 룩이 길거리에서 쉽게 눈에 띄기 시작하던 시점이었고, 1980년대에 정점을 찍었던 챔피언 의류의 고루한 이미지는 (세월을 따라 끊임없이 변신해온 나이키 같은 브랜드와 달리) 마치 타임캡슐처럼 보존된 빈티지의 이미지로 십대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하지만 챔피언이 가만히 앉아있다가 행운이 굴러들어온 것은 아니다. 챔피언을 인수한 헤인즈(Hanes Brands, 언더웨어로 유명하다)는 2010년에 하이프(hype)의 천재 브랜드인 슈프림(Supreme)과 콜라보를 통해 십대들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그 이후로 베이프(Bape), 우드우드(Wood Wood), 언디피티드(Undefeated) 같은 브랜드와도 작업을 함께 했다. 특히 인기 패션디자이너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오프화이트(Off-White)와의 2017년 콜라보는 챔피언을 힙한 브랜드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래된 브랜드 챔피언의 부활 노력과 함께 살펴봐야 할 유사한 케이스가 휠라(FILA)의 부활이다.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브랜드였지만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한물간" 브랜드 취급을 받았던 휠라도 80년대 레트로의 수혜자다. 지금은 디스럽터(Disruptor) 운동화로 전세계에서 프리미엄급 브랜드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휠라 역시 고샤 르부친스키(Gosha Rubchiskiy)를 통해 관심을 끌어오면서 레트로 열풍에 합류할 수 있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은 진부하지만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명제다. 하지만 과거에는 스타일만 부활했다면 이제는 스타일과 함께 브랜드도 부활하는 시대가 되었다.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와 수십 년을 힘들게 버티던 브랜드들이 되살아나는 모습은 경이롭기 까지 하고, 그 과정에서 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오래된 브랜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돌아오는 유행도 스스로 돕는 기업을 돕는다.